정우 스님 (통도사 주지)

사람의 몸 얻기가 삼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 꽃과 같거늘 우리는 이미 이 몸을 얻었고, 부처님 만나기가 우담바라 꽃 피우기보다 어려운데 이미 여래를 만났으며, 청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어렵거늘 이미 들었으니, 이것은 마치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에서 해수면 위로 떠올라 구멍 뚫린 큰 나무를 만난 것과 같습니다. 또한, 이 목숨이 잠깐도 정지하지 않는 것은 마치 산 위에서 흐르는 물과 같으니, 오늘 내 목숨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언제까지 그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청년이나 장년 시절이 머물지 아니함은 마치 달아나는 말과 같거늘, 그런 처지에 있음을 알면서 어찌 마음을 놓고 나쁜 이치, 나쁜 법, 나쁜 감각을 일으켜 그곳에 머무르겠습니까.
나쁜 귀신이 우리의 허물을 시시탐탐 엿보는 것처럼 지수화풍 4대 악귀도 이와 같으니, 항상 나를 따라다니며 틈만 보이면 목숨을 거둬가려하고, 병들게 하려 하고, 늙게 하려 합니다. 마치 낡은 집이 이내 허물어지는것처럼 목숨도 그와같은데 어찌해서 우리가 나쁜 감각이나 나쁜 생각, 나쁜 마음을 일으키겠습니까.


저는 인과와 윤회, 업과 인연 작복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있습니다. 아미타경이나 정토삼부경에도 있지만 지장경에 보면‘우리가 영가를 위해서 천도를 하면 영가 몫은 3할이고 올리는 사람 몫이 7할’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할은 올리는 사람 몫이고, 7할은 영가 몫’이라고 해도 될 텐데 부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결국은 절박한 상황에 있는 우리가, 인과를 믿고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 우리 불자들이, 인연 작복을 통해서 선근이 증장되고 지혜가 날로 드리워져서 맑고 향기로운 삶을 가꿔 나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신심과 서원의 힘으로 더욱 진지하게 53일의 화엄산림에 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이웃 불자들이나 도반들에게 통도사 화엄산림법회에 대해 귀띔도 해주시고 영가 천도하는 것도 이야기를 해 주셔서, 한 영가를 모시더라도, 단 한 번 동참하더라도 더 많은 이들이 화엄산림에 함께할 수 있도록 화주보살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혼자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게 낫고, 둘이 하는 것보다는 셋이 하는 게 나을 거라는

마음을 여러 불자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선한 업을 지어 천상락(天上樂)을 얻었더라도 업이 다하지 못하면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

윤회의 세계에 다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직 업장이 소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업으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당의 육도(六道)에 나고 죽는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모든 얽매임이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공포를 초월합니다. 탐진치 삼독으로 점철된 헛된 인생으로부터 그릇된 집착을 버리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늙음에 대한, 병듦에 대한,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나면 이제 더는 무거운 짐을 짊어질 것이 없는 것처럼,

치우치고 얽매이고 빠진 속박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기도를 해야 하고

정진을 해야 하며 이런 산림법회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피안의 세계, 니르바나에 이르는 사람은 목숨이 다한 것에 대해 도리어 만족감을 느낍니다.
죽는 것이 두렵고 겁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불자들이여, 세상에 여섯 가지 만나기 어려운 것이 있거늘 내가 이미 만났으니

어찌하여 나쁜 감각을 마음에 두겠는가. 무엇을 여섯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부처님 세상 만나기 어렵
고, 둘째는 바른 법을 듣기 어렵고, 셋째는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기 어렵고,

넷째는 큰 나라에
태어나기 어렵고, 다섯째는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렵고,

여섯째는 모든 기관이 구족하기 어렵나
니 이 여섯 가지는 얻기 어려운 것인데 내가 이미 얻었으니

그러므로 나쁜 감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 여섯 가지 중에 몇 가지나 얻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것들을 느끼고 알고 가졌다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육도를 윤회하는 가운데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갈래 길을 도는 업은 짓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재가자도 그렇거늘 하물며 출가자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보살의 바라밀다는 올바름을 깨달을수 있는 첩경이고, 보살이 보시할 때에도,

또한 시주, 공양, 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도 늘 평등한 자비심으로 중생을

친자식처럼 생각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즉, 불자들이 만 중생에게 대하는 심성, 선의 심소의 작용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보살은 병든 사람을 보면 부모가 병든 자식을 살피듯 보살펴주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중생을 보면 병든 자식이 다 나은 것을 보는 것처럼 기뻐하고,

보시한 다음에는 장성한 자식이 스스로 살아갈 길을 모색함을 보는 것과 같이

 마음을 편안하고 넉넉하게 놓아야 합니다.

 

보살이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음식이나 옷을 보시하고 다양한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원을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보시하고 시주하고 공양하는 것은,

 내가 지금 동참하는 것은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모두가 큰 지혜의 법식, 법열, 법희 충만함을 얻을지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중생의 지혜를 완성해서 걸림없는 선업을 성취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 배려해야 함을 볼수 있었으면 합니다.


‘달라이 라마의 마음공부’라는 책을 보면“겸손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는

결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교만심을 꺾을 수가 없다.

실제로 겸손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내가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지,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만 갖고는

교만심을 사그라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또한“부자들은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그런데 그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철저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제 부자들은 스스로 사회주의 방식을 통해서

가난한 이들의 교육과 건강에 도움을 줘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즉, 건강한 자본주의 방식으로 돈을 벌되, 그렇게 해서 번 돈은 좀 더 유용하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다시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도움이 필요할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실로 자비심을 드러내서 지적해 줄 수 있고 요청할 수 있는

그런 용기와 겸손함이 우리 몸에 배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불자들이여, 보살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수행을 할 적에는 부지런히

 나쁜 마음을 살피거니와 범부 중생들은 이러한 나쁜 마음의 허물을 보지 못하고,

세 가지 나쁜 감각을 받는 것을 누(漏)를 받는다

 

이름하거니와 보살은 이미 보았으므로 받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았으며 내버려두고

수호하지 아니하며 팔정도의 성인의 도를 의지하여 밀고 보내고 끊어 없앰으로 보살들은

 번뇌를 받는 일이 없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에게 누가 있다 하겠는가.

이런 이치로 여래 세존은 유루(有漏)가 아니니라.”


어느 스님 기도문에 보니까“저희를 도와주소서, 저희의 모든 업과 무명업식을,

부정적인 감정들을 씻어낼 수 있도록 지혜를 주소서. 제 마음의 참된 본성을 깨닫게 하옵소서.”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수행을 할 적에 부지런히 나쁜 마음을 살폈거니와

범부중생들은 이러한 나쁜 마음과 허물을 보지 못하고 늘 그런 감각을 받는데,

 이것을 번뇌 망상, 누(漏)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살은 이미 그것을 다 보았습니다.

 

인과를 믿고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데, 그런 번뇌와 망상의 결과물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겠습니까?

탐진치 삼독심을 가지는 한, 절대 인과를 볼 수 없으며 윤회를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보살은 누를 받는 번뇌 망상으로 세 갈래 나쁜 길로 갈 수 있는 업연을 만나지 않거늘,

하물며 부처님이 그런 길을 걷겠습니까. 고로 우리는 팔정도에 의지하여

그러한 나쁜 감각을 밀고, 보내고 단절시켜서 일어나지 않도록해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