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무엇인가?①
부처님 도량이라고 하는 것, 부처님 품안이라고 하는 것. 사실은 번뇌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는 그러한 도량이 바로 부처님 도량이 해야 할 바람직한 역할이 아니겠나? 이렇게도 우리가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은 탐진치貪瞋恥 삼독三毒을 위시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복잡한 시대에 얼마나 많고 많은 문제들과 또 그 문제에 따른 인간의 뜨거운 번뇌의 열기가 들끓고 있습니까? 이러한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시원한 번뇌의 열기를 식혀주는 감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만치 그것을 바로 받아들이느냐 하는데 관점이 달려있다고 봅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인생 그 자체며 생활 그 자체다’라고 오늘의 법문 주제를 삼을까 합니다.
우리가 불교를 통해서 기왕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을 좀 더 바람직하게, 좀 더 훌륭하게 인생을 엮어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불교를 믿고 신앙하는 목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뜨거운 번뇌의 열기를 식히는 것이 불교의 역할이고 또한 중생들의 병을 고치는 것이 불교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불교라는 것을 통해서 인간에게 뜨거운 번뇌의 열기를 더 끓게 더 뜨겁게 해주고 병을 고치려고 하다가 오히려 없던 병을 더 보태고 만들어가지고 사람의 살아가는 길을 잘못 유도하는 그런 경향도 종종 일어나고 있고 도저히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현금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일에는 반대급부로 부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즉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가르침 이면에는 그 반대로 아주 병적이고 있어서는 아니 될 그러한 어떤 것이 있음으로써 불교를 믿음으로서 병이 되는 그러한 일들도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여러 불자님들이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 처음에 불교를 접할 때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접했는가가 중요합니다. 불교에 대해 모두들 그 나름대로 어떤 선입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 예로 불교라고 하는 것을 병원에 가서도 낫지 못하는 병을 낫게 하는 신비한 방법이 혹시나 있지 않은가? 또 불교라고 하는 의 세계를 통해서 내 생활의 풀리지 않고 있는 문제들을 어떤 묘수를 써서 그야말로 요행수와 같은 그런 것을 통해서 내 인생이 완전히 다른 어떤 방향으로 바꾸어 지게하고 내가 하고 있는 사업과 병이 낫게 하는 그런 비법은 없을까? 이러한 등등 미래를 예측한다든지 또는 가정사라든지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든지 어떤 신비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불교가 아닌가 하는 그러한 생각을 하고 불교에 들어오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여기 구룡사는 정법의 전당으로서 부처님의 올바른 법만 펴는 정법구현의 전당으로써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 하고 있지만 그런 과정에서도 한쪽 구석에 우리들의 인간적인 문제들을 해결책으로써의 요행수를 바라고 기대하며 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끝없이 한쪽에서는 생각하고 있는 그러한 마음들을 일부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며 인생 그 자체다. 이러한 바탕 하에서 불교를 신봉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의식을 염두에 두고 한 가지 예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누구라고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부산에 제가 잘 알고 있는 거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큰 건물을 하나소유하고 있으면서 그 건물에 회관이 있어서 그 회관을 가끔 법회장소로 빌려주십니다. 그 분은 상당한 지식과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불교를 신봉하였고, 그 회관에서는 훌륭한 스님들과 교수님들이라든지 불교를 잘 아시는 많은 분들이 10여 년 이상 그 분의 배려로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폈고 또 그 분이 그런 것을 많이 주선을 했습니다. 불교를 극히 이성적으로 정상적으로 불법을 신봉해 왔고 불교에 대한 이론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잘 알고 계시는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한번은 저를 보자고 하더니 말씀을 하시는 데 근래에 당신이 만난 어떤 거사님이 계시는 데 그 분이 바로 생불生佛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알기로는 그 분이 정말로 생불이고 생불인 이유가 이러 이러한 것이라고 당신이 시인하고 있는 어떤 불교를 저에게 이해시키려고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내용인 즉, 어떤 거사님이 불교라는 이름을 업고서 신흥종교와 같은 색채를 띠고 그 분이 활동을 하는데, 어째서 제가 아는 거사님이 그 분을 생불같이 모시게 되었는가?
그 연유는 당신의 자녀 중에 재수생이 있었는데 그 재수생의 대학 진로를 그 거사님의 지시에 의해 진학을 시켜서 합격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녀의 진학 문제가 그렇게 풀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풀려가지고 말하자면 그 분을 믿게 됐고 그 분의 말씀이라면 그대로 부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믿게 되어서 그 분을 생불처럼 모시게 되었고 또 어떤 가르침보다도 그 분의 가르침이 훌륭하다고 믿고 칭찬하면서 저를 설득시켰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내 마음속에는 현금의 불교를 이해하고 또 현실을 살아가는 일반 불자들의 어떤 성향이랄까 또 마음속에 있는 어떤 문제들을 그야말로 전체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법회하는 장소에도 가보았고 또 그 분의 설법테이프를 얻어서 듣기도 하고 저 나름대로 백방으로 듣고 연구해 보았지만 정상적인 불교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십여 년 이상, 그야말로 부산에서 이렇다 하는 지성인이고 사회적인 지위도 상당한 그런 분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까지 그 분에게 빠질 수 있었는가?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익힌 정법으로서의 불교를 하루아침에 잊어버리고 사도를 따르게 되었는가는 사실은 굉장한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성적으로 집안이나 개인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와서 불교를 공부하고 기도하고 경전을 공부하고 참선을 하는 부처님의 훌륭한 삶을 우리 나름대로 공부하고 그렇게 해서 정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가르침의 길과 가정사와 사업문제 아니면 병고의 문제, 자녀의 진학문제 등이 걸렸을 때 그 문제의 비중과 과연 어느 것이 우리에게 다급하고 더 심각한 문제인가? 이런 것들을 냉정히 생각해 보니까 그 분의 그러한 상황들이 이해가 가기는 가더라는 것입니다. 많은 불자님들이 이성적으로 불교의 정법을 받아들이고 안다고 해도 어떤 개인적인 문제, 이해관계인 문제들이 거기에 개입될 때 그 동안 이성적으로 공부했던 정상적인 불교는 하루아침에 무효화되어 버리고 그쪽으로 기울더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인생사가 다급한 것이고 또 현실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가 그 분의 지시에 의해서 떨어져야 할 대학을 사실은 갔는지 아니면 그 분이 지시하는 대학에 가다 보니 우연히 합격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 거사님은 그 분의 지시에 의해서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놓으니까 그분의 말씀이라면 모두가 부처님 말씀이고 공공연한 법회장소에서도 여래如來라고 하는 표현을 쓸 정도로 그렇게 도취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동안 법회를 하고 제 나름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 불교에서 저를 구제하려고 하는 눈빛까지 보이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