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무엇인가? ③
중국에 유명한 조주스님이 계셨습니다. 부처님의 후신이라고 일컫는 스님인데 어느 날 한 스님이 조주스님께 질문을 합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침 공양이 끝난 후였던지 조주스님께서
“아침 공양을 하셨는가?”
“예 했습니다.”
“그러면 가서 설거지 해야지!”
어떤 것이 도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밥 먹었으니 설거지 해야지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이 이상 달리 어떤 말씀이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천추만대에 변할 수 없는 가장 도를 잘 표현한 대답이지 이밖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상한 뜻이 있으리라고 괜히 상상하지 마십시오. 불교에 지식이 있는 분들은 그것은 화두인데 화두를 함부로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니 된다고 합니다. 그 나름대로 화두병이 든 사람들의 말씀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동물은 묘해서 마음을 비우지를 못해요. 자정기심自淨其心, 스스로의 마음을 깨끗이 하라 했는데도 청정하게 가지지 못하니 말끝마다 그것이 병이 되어 버리고 보는 것마다 병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은 처처착착處處着着하니 곧 병이 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밥 먹고 그릇 씻는 것이 도구나. 그야말로 보통 우리가 살아가는 삶 그자체가 그대로 불교이고 도라고 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될 텐데, 거기에서 이상한 병이 들어 그것을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양 생각하는 거예요. 밥 먹고 그릇 씻는 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또 밥 먹고 그릇 씻는 그 일 이외에 그 순간 거기서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이 또 뭐가 있습니까?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최고의 일이며 가장 결정적인 인생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매순간 지극히 평범한 마음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불교이고 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 하에서 백팔 배를 하고 기도를 하던지 해야 잘못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불교를 통해서 병을 고치려고 하다가 오히려 병을 하나 더 얻는, 그것도 지극히 낫기 어려운 그런 삿된 병이 한 번 들면 고치기 힘듭니다. 몸의 병이 들면 병원에 가서 고치면 되지만 마음에 병이 든 것은 참으로 고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불교를 그런 삿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 몸을 설사 바꾼다 해도 고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병을 제일 경계하는 거예요. 몸의 병은 태워 버리면 되지만 마음의 병은 쉽게 고쳐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 생을 계속하기 때문이죠. 마음으로 지은 업이니까 그 업은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굳이 영험과 신통묘용을 꿈꾸고 있는 불자님이 계신다면, 또 우리가 정법을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도 뭔가 신비한 것이 있는 것이 불교가 아닐까하고 굳이 그런 신통묘용과 영험을 꿈꾸신다면 제가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영험은 내 자신 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어요.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설사 기도를 통해서 또는 누구의 지시를 통해서 병이 나았다, 승진을 했다, 자녀가 합격을 했다, 사업이 잘된다, 안 팔리던 집이 팔렸다. 그런 것들을 설사 마음속에 그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자신 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십시오. 그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 진실한 인간의 참모습은 본래 그러한 영험스러운 것과 신통묘용이 우리들 자신 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으니까 절대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 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데 남에게 물어볼 것이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시고 스스로 자신의 주인 된 마음가짐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는 어떤 일도 내 힘에 의해서, 내 공덕에 의해서 해결되어 지는 것이고, 이끌어나가는 것이지 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신념을 가지셔야 됩니다. 그것은 불교의 교리라든지 여러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서 소상하게 공부할 그런 기회를 불교교양대학 등을 통해서 불교개론을 정립하고 확신을 가질 기회를 따로 가져야 되겠습니다마는 이러한 자리에서 낱낱이 소상히 말씀드릴 기회는 아니 됩니다.
우리들 자신 속에 모든 문제들의 해결책이 있다는 그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 모든 해결의 열쇠를 가진 능력 있는 우리들 개개인의 삶이 그대로 불교요, 도다라는 그러한 신념 하에서 살아나가야 된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다 속에 온갖 크고 작은 고기들이 삽니다. 그런데 작은 멸치가 바다라고 하는 말을 수없이 듣다보니 과연 바다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하도 궁금하여 어른 멸치에게 물어봐도, 다른 큰 동물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시원치 않아서 바다의 왕인 용왕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용왕은 눈뜬 분이니까 멸치는 물었습니다.
“용왕님 바다가 무엇입니까?”
용왕의 입장에서는, 바다를 제대로 아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대답하기가 곤란합니다. 자기 자신도 바다에 있고 지금 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바다 속에 있고, 멸치 자신도 바다 속에서 태어나고, 바다 속에서 살고, 바다 속으로 돌아갈 것이고, 가나오나 항상 바다입니다. 바다에서 출발해서 바다에서 끝납니다. 영원히 바다 속에서 처음도 끝도 없이 바다에서 삽니다. 용왕도 멸치도 모든 고기들도 그 자체가 바다입니다. 아예 바다다 아니다 하는 그런 분별이 있을 수 없는 그런 처지입니다. 바다 밖에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습니다. 바다 속에 있는 것들이 어떤 것이 바다냐고 묻고 분별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용왕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히는 일이죠. 그래도 용왕은 멸치에게
“너도 바다요, 나도 바다요. 온 우주가 바다다. 네가 오줌을 누어도 바다요, 숨을 쉬어도 바다다. 처음부터 끝까지가 바다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어도 그 멸치는 도대체 이해가 안 됩니다. 큰 용궁이 있고 그리고 다른 고기들도 있고 땅이 있고 그리고 자기 자신은 조그맣고 이러한 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용왕 혼자 어디 특별히 바다에 갔다 오지는 않는지, 아니면 큰 고기들이 바다에 갔다 오지 않는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예화를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새기십시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현실, 또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삶 그자체가 완전무결한 본래로 갖추어진 그러한 삶이라는 것을 떠나서 달리 다른 요사스러운 수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다면 부디 그것을 항복받아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그야말로 평상심이 불교이고 도라고 하는 바탕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요사스러운 병이 들지 않지 신기한 것을 찾아가고, 어디서 누가 안다, 거기 가야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그러한 기만과 요사스러운 말에 현혹되어, 그것이 불교의 목적인양 머릿속에 인식되어 버린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를 깊이 제대로 알지 못하더라도 불교를 잘못 아는 그러한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 속에 영험이나 공덕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자신이 바로 불교와 도 그 자체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어디를 가도 내 인생입니다. 엎어져도, 자빠져도, 서도, 앉아도 내 인생입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한순간도 떠나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있는데 다른 어떤 병을 고친다든지 잘 보아 준다든지 하는 요사스럽고 요행스러운 그런 방향으로, 마음 한구석에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그러한 마음을 싹 비워 버리고 보다 더 훌륭한 삶으로, 정상적인 삶으로 우리가 엮어가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 그러한 마음을 깊이 새기시고,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기도를 하고 예배를 해야 올바른 불교인이 되고 올바른 인생을 영위한다는 것입니다.